보성선씨 블로그의 퓨전  보성선씨(寶城宣氏)

                        (싣는 순서는)

                    1. 그림으로보는 보성선씨 

                    2. 1613년 도공 선문환님의 보성선씨

                    3. 1681년 선응뢰님의 보성선씨

                    4.  선씨 2,800년의 역사

                    5. 보성선씨의 유래

                    6. 선씨: 황제부터 현세까지

                    7. 아쉬운 보성선씨의 해설들

                    8. 영원히 잊지못할 가슴아픈 역사

                    9. 새로쓴 보성선씨

 

    1. 그림으로 보는 보성선씨

 

  

  

 

 

 

   

             오타:  설치후 바료 ☞ 설치후 바로

 

 

 

 

      오타 :적기공신☞ 적개공신

 

  2. 1613년 도사공 선문환님의 보성선씨 

아! 우리 선씨의  본관은 보성에서 나왔는데  대수가  오래되어(세월이 너무나 흘러)  그 시기를 알 길이 없으나  보성으로 본을 세우기 전에는   중국으로부터 한반도로 이주해왔다.  백제 전에는 선씨들은 복호촌에서 살았었는데 복호는 산양의 옛이름이며 선씨들이 대대로 살아온 터전이다.

 

 행정 구역 개편시(주:백제 근초고왕)  대토를 주고  선씨들이 본을 세우고 살아오던 터(주:현재의보성읍 또는 미력면 장동으로 추정됨)에다 관지은후  현명을 "복홀"이라 바꾸었는데  복홀은 복호라는 뜻이고  성군의 지형이 마치 호랑이가 엎드린 모양과 같다는데서 유래한다.이때부터  선씨들은 각기 분산해서 살게되었는데 현재의 보성선씨 선조들은 동노군 적촌면으로 이사를 하였다.  동노는 바로 조양현의 옛 명칭이요 적촌은 바로 지금(1600년대)의 도촌면이다. 분파된후(주: 현재의 보성선씨 선조들과 또다른 계열들과의)로 부터  휘용신 이상의 대수와 이름자를  알아볼 수 있는  근거 문헌이 없었던고로  용신씨를 근대의 중시조로 삼았는데 그 뒤로 또 수백년이 되었다.  옛부전해온 선씨들의 역사와 비망록 등의 내용이 이러하나  증거할 역사가 고 또 수많은  병화를 겪어 참고될만한 증거가 없어젔으니  미약한 후손들이 생각하는 마음이 어찌 한이 있겠는가.  하지만  말 할 수 있는것은 옛사람의 시에  "증빙할 문헌이  없다고 못 믿는단 말을 말라  그런 사실들이 없었다어떻게 지금까지 그 내용들을 말해올 수 있을것가?" 했으니  문적이 없다해서 전해오는 말들을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는것은 큰 잘못이다우리 시조로부터 후손인 지금의 까지  대수가 12대인데 10대 형제는 두분으로 형은 좌우위보승랑장  원지님 이시니  바로  우리계출 선조이시며  동생은 전라안렴사  윤지님이시다.    9대조 형제도  또한 두분이신데  형은 호용위 선전관을 하신 중길님으로  또한 우리의 선조요 동생은 참의공 중의님이시니 우리의 방선조이시다 . 이상의 세대는 알아 볼수있는 문적이 없다가  많은 전란을 겪었어도 다행히 참의공(선중의)의 호적이 지금까지 남아있어   참의 이상의 부와 조.증조의 이름자를 확실하게 알 수 있게 되었으니   전해온 증언들보다는  믿을 수 있는 하나의 큰 문안(문적)이 아니겠는가.  이와 같은 사실에 기초하여 우리 선 비조 중 참의공의 증조를 중시조로 모신후 지금까지 수백년이 지났는데  우리의 아버님 할아버님 이상에는문이 높으신 분과 큰덕을 갖춘 분, 고관 대작이 대대로 끊임없이  나오셨다는 것은  말이 필요없고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 동족들이  여러곳에 흩어져 살면서  선대의 대계를 증거댈 수가 없으므로  약식으로  이렇게 (가승을)만들어 노니  증거자료로 충분하다. 문권이나  족보가  병란으로 없어져버렸으니 만약 이렇게라도 기록해두지 않으면  후손들이 선대의 세계를 어찌 알 수있겠는가(느냐) 

 

 

 

 1613년(광해군 5년.  계축년)  2월    

 

 12세손  통훈대부 행벽사찰방.금부도사 문환

 

家承序(癸丑 家承)

 

嗚呼 惟我宣氏 姓貫出自本郡 世代綿遠 不知幾百年而 系以寶城之前則 盖自中國來東土矣 粤在百濟前 宣氏世居伏虎村 伏虎乃 山陽之舊號而 宣氏世基也  改易州郡時 換以代土  立官舍 于宣氏世基 改縣名曰伏忽  伏忽卽 伏虎以其地形之 似虎伏也 自是之後 宣氏 各分散居之際  惟我先祖移徙 冬老郡 狄村面  冬老卽 兆陽縣之舊號而 狄村卽 今之道村面也 自分派之後  至諱用臣氏以上 代數 名子 無文可考 故用臣氏 爲近代中始祖 其來 又 累百年矣 古今傳聞 及 出於裨說者 如是而 旣無信史可 又 累經兵燹 無可憑則 顧玆孱孫 感舊之懷庸有巳乎 抑有可言者 古人詩云  無文 戒勿云難信非實何說到今 然則 不可以文籍之不存而 流傳之語歸之 於不實也 自我鼻祖及 今耳孫 代數十二代而 十代祖兄弟 只是二分而 伯氏 左右衛保勝郞將  諱元祉 卽吾系出之祖先  季氏  全羅道按廉使 諱允祉  九代祖兄弟 又是二分而 伯氏 虎勇宣傳官 諱仲吉 亦吾之先祖也  季氏  參義公 諱仲義 乃 吾傍先祖也 以上世代 無文可考而 所可幸者 兵燹之後  參義公戶籍 至今猶在  參義公以上 父及 祖 曾祖 諱 昭然可考則 非若 傳聞之可證 豈非可信之  一大文案乎 惟其如是而 吾先鼻祖 以參義曾祖 爲 錄者 于今 數百年而 自吾父祖以上 文人 碩德 高官大爵  世出不絶而  同然一辭少 無可疑者也 吾同宗 散處 各邑 先代系 旣無可證則 略書草記 憑驗爲可 文券 及 族譜見失於兵亂 若不此記則

後孫 先代世系 何可考知哉.

 

萬曆 四十一年  癸丑 二月

 

十二世孫.通訓大夫.行碧沙察訪.禁府都使

 

                                          文煥 撰

粤(월) 단정 어조사: 於, 際:㉠즈음 ㉡가 ㉢변두리 ㉣사이. 때, 裨說: 도움되는 얘기들, 訂㉠바로잡다 ㉡고치다 ㉢정하다, 庸:㉠떳떳하다 ㉡쓰다 ㉢어리석다 ㉣범상하다 ㉤평소(平素) ㉥공적 ㉦수고 ㉧어찌, ㉠누르다, 억누르다 ㉡굽히다, 숙이다 ㉢물러나다, 물리치다 ㉣가라앉다 ㉤막다, 다스리다 ㉥아름답다, 예쁘다 ㉦또한 ㉧문득   燹(병화선.들불희) ,孱(잔약할 잔), 刱(처음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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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성선씨의  유래

 (임경업장군 참모관. 선문환님의 글)

     위글의 요점 정리

 1. 선씨들은 중국에서 왔다.

 2. 중국에서 이주한 시점은 백제전(AD 원년 전후)이다.

 3. 맨처음 기착지는 복호촌(보성)이다.

 4. 관을 보성으로 세운지는 너무 오래되어 알 수없다.

 5. 백제 근초고왕의 지방 조직 개편시 복홀현이 설치되고

     선씨들의 세기에 관사를 지었다(346년 경)

 6. 이때 대토로 받은 땅으로 분산하여 살게되었다,

 7. 용신씨의 조상들(현재 대한민국의 보성선씨 선조들)은 

     동노군 적촌면으로 이사하였다.

     동노군: 조양현,  적촌면: 1613년 당시의 도촌면

 8. 용신씨 계열에서 그 이상 선대의 기록을 확보치 못해 

     용신씨를 근대의 중시조로하였다.

 9. 이상은 모두 전사(傳史)이고 근거 문적이 없던차에 

     참의공 호적이 전란후에도 남아있어 (시조공에 대한)

     근거 확보하였다. 그후 참의증조를 시조로 기록하다.

10. (선문환님의)10대조는 두분으로 형은 원지, 동생은

      전라도 안렴사 윤지이시다.

11. (선문환님의)9대조도 두분인데 형은 절도사 중길,

           동생은 참의공 중의 이다. 

 

 

위 글은

진무 원종1등 공신이신 보성선씨 선문환님이 쓰신 글로 계축년<1613년:광해군 5년>  가승의 서문으로 전해온 글입니다.    당시의 보성선씨에 대한 유래를 명확히 정리하시었기  너무나 값진 내용이며   금과옥조로써 한자도 소홀히 해서는 않된다는 생각입니다.   선씨들이 한반도에서  세거한(산)지 아주 오래되었으며(不知  幾百年而)   중국에서 건너와  백제 전부터 복호촌에 터잡고 살았고      복호는 복홀의 前 지명이며  복홀현(縣)이 설치 될 때 신설 현의 관사 터로 세기를 내주고 대토로 받은 땅으로 각자 분산했다유래를 적시 하셨습니다. 복홀현은 백제 근초고왕(346년)때  설치된  보성군의 옛이름이라는 것은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또한

 

용신님 前(앞) 선대들의 이름자를  알 수 없어 그분을  근대 중조로 모셨으나  여러 백년이 지나는 동안  이를 뒷밭침할 문헌을 확보치 못했었는데 다행히  병란에도 참의공 호적(선중의 호구첩)이 보존되어  전해들은  내용들로 관리해오던 선대들 기록의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였으며  그후 또 수백년이 지난  시점(1613년)에서  잃어버린 족보를 대비 가승(계축보)을  정비하면서  이 글을 쓰심을 밝히셨습니다.  그동안  전란이라고하면 흔히 왜란.호란 양대 난으만 생각들 하였으나  이글에 나타난  "병선지후(兵t燹 之後)"는  남해안 지역의 왜구들의 잦은 약탈 등  다른 여러 전란도 포함됨을  알게합니보성선씨들은 이미 4세기경 본을 세운(선씨들의 세기를 관사터로 내주다)것으로 이해됩니다. 1600년대에 보성선씨 문중 내에는 어떻한 분란도 없었음을  알게하고, 선원지 선윤지 두 분 형제님들에 대한 최고의 기록이며, 보성선씨들 세수에 대한 기준(10.9대조,   12세손 등)을 세우고, 명나라 귀화설도 없었음을 알게합니다. 선씨들의 先史시대와 不明했던 보성선씨들의  초.중기 역사간에 명확한 선을 그어 주신 소중한 글입니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에 기탁 보관중인

       1757년 발간 판서공계열의 정축보에 실려있습니다. 

 

 

  3. 1681년 선응뢰님의 보성선씨

    보성선씨들 중 

    (보성계열): 선복주,선응뢰. 선찬두. 선남두.선문교 

    (장흥계열): 선형중 선이례 선형의 선세징 후손들은 반드시 보셔야.....

    

    소개할 선응뢰님의 글을 보면

    1600년대 이전까지는보성선씨 양파는 화합하여 행복하게 잘 살았음을 암시

    합니다. 명나라 귀화운운하는 얘기 털끝만큼도 없습니다.

    한반도 시초의 선씨는 막연히 8학사 7대신이 올때 참여하여 오시지 않았나 

    하는 정도의 정보밖에 없었다 하셨습니다.

    선응뢰님은 너무나 답답하여 한서를 몽땅 뒤저

    선씨들 자료들을 직접 확인하셨는데

    마침내 한나라말 이주해온 문구를 확인하셨습니다.

    노대부 후손이라는 말씀 일언 반구도 없었습니다.

    한반도 선씨들이 중국득성시조 세분중 누구의 후손이였는지는 당시에는

    전사(傳史) 조차 없었음을 알게합니다.

    노대부의 후손이라는 근거없는 설은 선씨들이 보유한 전사에서 유래해왔든

    게 아니라 남의 정보를 이용했을 뿐임을 알게합다.

    1681년 신유년에  조선땅의 모든 보성선씨들의 자료를 모아 한개의 족보를

    복원하였는데 아홉분의 쟁쟁한 계열별 대표들이 참여하셨음을 실명으로

    기록해두셨읍니다.

    다행이 조도계열(조성.홈동)에서 기사 별보시까지는 선씨가 하나였다는 모든

    옛 기록들을 고스히 보전해왔는데

    이중 선응뢰 선대님의 글(신유보 서문)은 어떠한 이론으로도 뒤집을 수 없는

    내용들입니다. 말미에 실린 선남두님의 시에도 선씨의 선조들이 중국

    왔다는 말씀 외에는 다른 말씀이 없습니다.

    참고로 당시 족보 편찬위원 아홉분들은 금세(今世)의 어떤분들보다 선씨에

    대해서는 박사들이셨고 가문을 사랑하시던

    자랑스런 우리의 선대들임을  감히 누가 이론을 제기할 수 있을까요?

 

선응뢰님(능성현령 선시중님의 7대손) 쓰심

족보는 무엇을 위하여 만드는가요?

세계의 이어짐을 잊어버릴까 걱정하여  그 계보를 전하기위해 만드는것입니다. 옛 선대 분들이 이르시길  "우리나라 선씨들은  중국에서 왔는데  혹은 팔학사들이 오실때, 또는 칠대신들이 오실때 함께 오셨다" 고 하셨습니다만  전해오는 말씀들로  믿을 수는 없읍니다.

내가 한서를 보니 한고조 2년에 선호(주:한고조 공신 서열 63위, 장도의 난 평정에 유공)라는 분을  천호후에 봉하였고  또 선의(주: 한고조 공신 서열 122위, 진희의 반란 평정에 참여)라는 분도 천호후에 봉하였다 기록되어 있었으며,  한나라 말에 이르러 중국에서 다수의 선씨들이 해동으로  피난했다기록이 있었습니다.

이런 말들 중 8학사.7대신 설은 근거가 희박하고 중국에서의 이주설은 믿음이 갑니다.    아아! (우리 동종들이)처음엔 한 뿌리였는데 나뉘어 여러파가 되고  많은 고을에 펴저있군요. 그 옛일을 기억치 못하였다면 우리 조상님들께서 쌓으신 덕과 베푼 어지심이어찌 바로 오늘에 이르렀겠습니까.  윤지 할아버님의 공훈은 여지(동국여지승람을 기초한 각 지방의 소개서)기록이 되어있고  유성군 형 할아버님의 애쓰신 공에 대한 포상 기록이 옥책(좌리공신 교지로 보나 현재는 조선왕조실록으로 보아야: 실록에 104건의 기록이 있음)에 기록되어있으니 원래 없는 사실이라면 후손들이  대강의 일을 어찌 지금 논할 수 있을까요. 남원부사를 하신 휘 안경의 4대손 중윤씨는 홀로닦은  훌륭한 실력으로 중시에 장원을 하시었고  6대손 세휘씨는 역시 글이 높아 알성의 으뜸으로 급제하시고 그이름은 용호의 방에 붙고 사마시문에 오르는 등은 확고하고 변하지않을 기록들입니다.  그러나 선세의 족보를 잃어버린 후 선대들은 이미 돌아가시고 후손들은 더욱 멀어젔는데 후세에서 누가 이를 쫒아할것이며 그 내용을 알겠습니까? 이에 뜻을 같이한 종친들, 보성에 사시는 선찬두.남두.문교,   장흥사시는 선형중.이례.형의.세징 등과 더불어 봉림사에서 회합하였습니다. 문장이신 선복주씨가 편집에 관여하시고 또 여러 집안에 남아있던 가승등을 살펴 이족보를 편찬 완성하였습니다.  아  근원이 한곳인 한파의 종인들이 이 세계를 보게되면 조상님들을 기리며 함께 화목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중에는 혹 분파되어 잘알 없는 분들이 있었기 족보 끝에

별도로 기록 하였으니 훗날 밝혀지면 바로 잡으십시오

 

선응뢰(宣應賚)撰

族譜 何爲而 作也 憂世系之失 其傳而 作也

古人有言曰   吾東方宣氏  來自中國而  或曰 參於八學士之來   或曰 參於七大臣之來  流傳之說  雖不可 盡信 余嘗觀 漢書    高祖之 年有曰   宣虎 以擊陳之功  封千戶侯  又 有宣義  亦以功  封千戶   侯而 逮至漢末   中國之宣多 竄海東 以此言之則  八學士七大臣之說   雖不可徵而   自中之說   庶可驗矣 嗚呼  當初  一源分爲百派蔓延 州者   其麗不億則    豈非吾祖宗積德累仁之攸致歟 按廉使之立祀酬勳 旣載於 輿地    楡城君之畵像褒功著 於玉冊則

元非後昆 所可論而至 若   南原府使諱安景四代孫 重倫氏  以楊妙技參 於重試之六代孫 世徽氏  亦以文章大才 居於謁 聖之元 此則 拔萃選及第而 其餘名 參龍虎之榜 身登司馬之門者  固不可彈記也 雖然 先世 族譜 失亡之後 

古人已去 後孫益遠則 此後世系 孰從而知之 慈與同宗同志者寶城居 宣燦斗 南斗 文及 長興居 宣衡重 以禮 衡懿 世徵 等  期會于鳳林寺 參考  門長 宣復周氏 若干輯錄 又 考諸家之遺籍纂成 是譜 噫我同源一派人  觀此世系則 其無追遠 敦睦之意乎  其中或有分派之 未詳者 故別錄 于族譜之末 以爲日後 知者之考 正云爾

 

말미에 실린

宣南斗님의 시

  吾門請遡先公說   來自中原幾百年   

 按使楡城前後孫   白蓮丹桂弟兄聯    

 醇儒碩士皆豪傑   笏峨冠互續連   

 却恐世泯慽    獨修遺譜示來賢

  http://blog.daum.net/qianfu/6036555

 우리 宣門 유래 옛분들 말씀하길,

 까마득한 옛날 중원에서 건너왔다네,

 안렴공.유성군의  선대며 후손들로,

 백련.단계같은 귀한 형제들 끊임없었고,

 지조있는 유생. 큰 선비들 모두호걸이며,

 고관 대작 높은 벼슬 끊임없이 이어가네,

 세대가 멀어지고 슬퍼할 걱정 떨궈버리세.

 옛보첩 잘다듬어 내놓으니

 현자들이 보러 찾아드네

 

                  아래:1757년 족보에 보전조치한 원문

 

    위글은 1681년도에지으신 글로 보성선씨 판서공 후(세칭 홈동파)

    1757년(정축년) 족보에 실려 전해온 내용입니다. 정축보는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기탁 보존 중입니다.

     요점 정리

1.우리 선씨들은 중국에서 왔다.

2.중국에서의 이주 시점을 정확히 아직 알고있지

   못하나

    8학사(당나라)가 올때     혹은

    7대신(미상)이 올때 참여하여 왔다는 설이있다.

3. 그러나 한서(漢書)를 직접 확인한바

    "선호.선의 두분이 하나라 고조 때 1000호후에

     피봉되었다"는 내용과

    "한나라 말에 상당수의 선씨들이 해동으로 피신

     하였다" 기록되어 있었다.

      이 내용이 정확한 정보다.

     (한 고조 건국당시 공신인 선호.선의 두분에

       대한 내용은 한서 16권 부록 공신표 확인됨)

4.안렴사의 공은 여지(확인되지 않음)에 실려있고

   유성군의 공은 옥책(좌리공신교지: 유성군의

   행적이 낱낱히 기록되고 공신교서가 실린

   조선왕조실록으로 해석해야)에 기록되어 있다.

5.이런 선대들의 훌륭한 행적이 족보가 없다면

   어찌 후손에게 그 내용들이 전해질수 있겠는가? 

6.그래서 선복주를 문장으로 하여  

   보성 대표로  선응뢰. 선찬두. 선남두.선문교 

   장흥 대표로  선형중 선이례 선형의 선세징

   관산의 봉림사(장흥의 봉림사는 확인되지 않음.

   장흥에 보림사는 있는데 옛날 이름이 봉림사인지

   알 수 없다)에 모여 각가정의 가승등 유적을

   근거하여 족보를 완성했다.매우 기쁘다.

7.계열이 불확실한 분들은 부록에 올려두었으니

   후세에 확인이되면 등재할것.

*.선남두님의 시(아래 참고)  말미에 실림

 이 글의 보존 경위

此則 綾城 七代孫 應賚之 所作也而  應賚卽 允祉之派也

曾於康熙二十年 辛酉 本郡及 長興 樂安 諸宗   合謀修譜而

以此序昇之 於卷首矣    其後 以弼夏 壽龜等 變至  於各譜之境則

此序果 無用之文 不必錄之於此而   姑錄 于此者

以明 辛酉年 同始祖 合譜之意耳

    丁丑(1757년) 三月下澣 十六代孫  璨重

                                                                                                     

이 서문은 능성현령 선시중님의 칠대손이신 응뢰님이 지으신것입니다.

응뢰님은 바로 윤지님 파입니다. 옛 강희 20년(1681년)에 본군및 장흥,

낙안의 여러 종친들이 함께 족보를 복원하시고   이 서문을 족보의 첫

머리에 올렸습니다. 그 후 필하 수귀님이 변심하여 각보 지경(갈라섬)에

이르렀기 이 서문은 무용지물이 되어 우리족보 서문으로 실어둘 필요가

없어 원문을  족보 부록으로 기록하여 신유년(1681년)에  같은 시조로

족보를 복원했던 뜻을 밝혀두고자  합니다.

  1757년 3월 하순  (도촌계열) 16대손 찬중

                                                                                                    

.............................................................................................                     

(진:다하다,완수하다,극치에 달하다,최고에 달하다,다 없어지다,사망하다,죽다,모든

전부의,만,다만 ~뿐). (증거). (덩굴, 덩굴풀 ,순무 ,덩굴지다,퍼지다,뻗다,감다). 

 ( 것,허락하는 소리,여러, 무리,이,~면(접속사),~와 같다,기재하다). (바=所 유,곳,

장소, 처소,이, 이에,語助辭,재빠른 모양,위태롭운 모양.  (여: 어조사,편안한 기운).

輿(여: 수레,가마,땅, 輿地-지구 大地-동국여지승람을 기초로한 각지방에 관한 책)

(나타날저 붙을착:입다,쓰다,다다르다).玉冊: 제왕 후비의 송덕문을 적은 옥조각을 엮은

책.(괴: 魁首, 우두머리,壯元,으뜸).重試: 문무에 당하관을 위하여 둔 과거 , 고려16대 예

종 17(1122)년에 처음 실시, 조선 세종때제도화, 10년에 한번씩 실시 합격자는 당상의 품계

로 올려줌.(알:뵈다,아뢰다,알리다,고하다,여쭈다,청하다 ,객사(客舍),명함,중개.(으뜸,

처음, 始初,우두머리, 장원,頭目,임금,첫째, 첫째가 되는 해나 날). 元非(원래가 아니다).

(여러,거의,바라건대,무리,서출,벼슬이 없는 사람,支孫,가깝다,바라다,많다, 수효가 넉

넉하다,살찌다,제거하다,하다,賤하다, 卑賤하다.(같다,너,만일).(고:단단하다,방비

오로지).(탄알,과실,열매).(방:매,매질하다,배를젓다).(누구,어느,무엇,익다). 從(종:

좆다,순직하다) 徒(도:무리,동아리,걷다).衡(형). 懿(아름답다,좋다) (일찍,이미,이전에,

거듭,겹치다,더하다=增, 늘다,늘어나다,포개다.司馬(생원과 진사를 뽑음,小科로 初試와 覆

試). (려:곱다,우아하다,짝, 지나다,지나다=과거) (약: 같다,너,만일) 至若(그러다가).

萃(발췌: , 글 따위에서 필요 또는중요 부분을 뽑아냄, 또는 그런 내용=拔群. (교:움,움

막,간직하다,뚫을찬 일수도) (대강개:槪동자)姑(시어미고).翹(위 원문중 문교=높이날을

교로 보이나 사전에서 찾을 수없고 pc내장자도 없어서 우선 翹(교)자로 처리, 핵-력자 일수도

선문력?) 용호(자웅을 기릴 수없는 훌륭한 분들).알성시(임시 과거)

 

 4.선씨, 2,800년의 역사

       보성선씨(寶城宣氏)

 

 

 

◎ 漢末 中國之 多 竄 海東(한말 중국지 다 찬 해동)

  (한나라 말에 다수의 선씨들이 한반도로 피난하다)

 일찍이(1681년) 보성선씨 선대이신 선응뢰(宣應賚: 능주현령 시중님의   대손)님께서는 한서(漢書: 반고著, 중국 전한의 역사서)를 뒤저 몇자 안고귀한 선씨 관련 자료를 아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신유보(1681년 보성선씨 판서공 원지後와 안렴공 윤지後양파가 복원한

대동보써 1749년까지의 선씨들 舊譜) 서문에서 "우리나라 선씨들이 중국에서 왔는혹은 8학사가 올때, 혹은 7대신이 올때 참여했다하나 유전된 말로 믿을 수 없지만 중국에서 왔다는 것과 선호, 선의 두분을  漢

조가 천호후에 봉했다는 내용,                          그리고

         "한말에 선씨들이 해동으로 수 피난했다"는

기록들증거할만 하다”고 정리해주셨습니다.

宣應賚 著譜而 序之曰 東方之宣 來自中國而 或曰 參 於八學士之來 或曰 參 於七大臣之來云而 流傳之言 雖不可信 嘗觀 漢書 則 高祖 二年 有 宣虎 以擊 陳狶之功 封千戶侯 又 宣義 亦以功 封 千戶侯而 逮之

             "漢末 中國之 宣多 竄 海東"

조선 중엽의 어려운 악조건 하에서도 조상의 뿌리를 확실히 하고자 멀고도

광활한 중국 대륙을 뒤저 깨알 같은 소중한 자료를 찾아내신 선씨 선대들의 정열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요즘 선응뢰 선대께서 확인하신 내용들여러곳에서 쉽게 접할 수 있어 당시의 자료들판단이 틀림없고 빈틈이 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網상에 이미 공개된 자료입니다)

 

確認例: 漢 書 卷 十 六 (高祖 功臣表)

南 安 嚴 侯 宣 虎 以 河 南 將 軍 漢 王 三 年 降 晉 陽 , 以 重 將 破 臧 荼 ,侯, 九 百 戶. 土 軍 式 侯 宣 義 高 祖 六 年 為 中 地 守 以 廷 尉 擊 陳 豨, 侯 , 一千 一 百 戶, 就 國 後 為 燕 相

그렇습니다.  

보성선씨들의 조상들은 한말(AD원년 전후)부터 한반도로 이주하기시작

하였습니다. 그후로 천년이 두 번 흘러 이제 선씨들은 호남의 명문에서

대한민의 명문으로 우뚝섰고 번창했습니다.그래서 모든 선씨들은

씨임이 자럽고 즐겁습니다. 앞으로 누천년을 우리 자손들이 선대

들로 인한 영광을 누릴 수 있도록  최선의 삶을 살아야 할것입니다.

qianfu의 웹페이지를 접한 여러분들을 환영하며 선씨 유래와 역사의 대

강을 소개합니다.

본자료에 선대들의 함자에 휘(諱) 붙임을생략합니다.

諱: "꺼릴휘"  "死者이름 휘"로 통함. 원래(중국에서부터) 임금이 죽으면 이름을 함부로 부르거나 쓰지 않았는데 점차 사대부 평민도 따라하게 되었음. 조선때는 매우 엄격하여 박지원(연암) 선생 같은분은 사헌부로 발령이 났는데도 사헌이 考의휘(돌아가신 아버지의 이름)와 같다고 착임 불응했다는 예(例)도있음. 禮記에 卒哭하면 휘를 취하되 한자를 취한다(이름이 두자일 경우 그중 한자만을)고 되어있는데 忌諱(이름 쓰기를 꺼림)는 여기서 유래함

 

대강(大綱): 선씨의 본은 하나뿐

 

선씨는 보성선씨 단일본(單一本)입니다. 전라남도 보성군이 관향이며

몇개본(本)이 더있다는 자료들이 있으나 계보(系譜)에서 일탈(逸脫)한

특정파(派)의 오해에서 비롯하였고 모두 동원(同源)임이 확인되었습니다.

현재 패주군(貝州君)의 손자들인예의판서공(禮儀判書公) 원지(元祉)

님과호남안렴사공(湖南按廉使公) 윤지(允祉)님의 후손들로 양대(兩大)

계보이루고 있으며 예전에는  보성 장흥 光州 전주 대전 김해 강능

고양 광주(廣州) 등에 집성촌을 이룬곳들이 많았으나 현재는 12,094 가구

38,849명이 수도권을 중심으로 전국에 고루 분포하며 성씨별 인구 순위는

70위 내외입니다. 성학(聖學)을 숭상(崇尙)하고 충효(忠孝)를 실천하며

애향(愛鄕) 애인(愛人)의 가풍으로 일찌기 호남의 대족(大族)이 되었고

국난에는 전(全) 문중이 대처하며 상당수가 목숨을 바치는 충절도 마다하

아니하였습니다. 호남안렴사(湖南按廉使) 윤지를 비롯한 형. 거이.세강

약해는 오충(五忠)으로 후손들과 향민들이 수백년 제향(祭香)을 올리고

있고 수사 극례는 영남인들의 마음에 영원히 살아계시는 분입니다.병사

(兵使) 여경(餘慶)은 먹물로 상복을 물들여 노구의 몸에 걸치고 두아들

해수.인수와 종제 필백.경백.청원들을 이끌고 나가 평양성 전투 등에서

모두 분사 순절(殉節)하니 임난 육충(六忠)이며 가문과 향민의 자랑거리

요 유명 인사입니다.

 

 

 

本. 貫鄕. 籍貫. 本籍. 姓貫. 貫籍 등은 동의어 이며 시조님의 고향을 의미.

려조와 조선 초기 토성분정책(土姓分定策)에 따라 지방 호족들에게 왕이 성과 본관을 하사하여 일정 권리와 자율성을 인정해줌. 일종의 지자체 비슷하며 지방 민심을 제도권으로 자연스레 유도하기 위한 정책. 따라서 명문가는 보상(譜上) 수관(受貫)의 기록이 있을것임.

보성선씨들은 해동으로 이주해올 당시부터 선씨의 성을 유지하며 살았고 복호촌에 자연스레 세기를 형성하였습니다. 세기가 형성되면 그곳은 거주하던 사람들의 고향입니다.  선씨들의 고향 즉 본은 삼국시대 초기에 세웠다해야 옳습니다.

 

보성선씨 관향의 변천

1.복홀현(伏忽縣): 백제 근초고왕시 설치, 346년경, 복호(伏虎)를 개칭

2.보성군(寶城郡): 신라 경덕왕시 개칭

3.산양군(山陽郡): 고려태조

4.패주군(貝州郡): 고려 성종 15년, 996년 개칭

5.보성군(寶城郡): 고려 현종 9년 1018년, 환원

* 삼양군이라는 자료가 있으나 산양군의 오타임

  

  선씨 인구 분포

38,849

18,761

9,680

3,911

2,085

1,597

1,444

943

248

(호)

(12,094)

(5,635)

(3,247)

(1,215)

(643)

(518)

(459)

(296)

(81)

4만

 

 

 

 

 

 

 

 

 

2만

 

 

 

 

 

 

 

 

 

1만

 

 

 

 

 

 

 

 

 

5천

 

 

 

 

 

 

 

 

 

2천

 

 

 

 

 

 

 

 

 

15백

 

 

 

 

 

 

 

 

 

1천

 

 

 

 

 

 

 

 

 

3백

 

 

 

 

 

 

 

 

 

지역

수도권

전남

경남

충청

전북

경북

강원

제주

수도권:경.인, 충청:대전, 전남:광주, 경남:부산, 경북:대구,울산 포함

(최근 국가 통계)

 

○ 선씨의 발원(發源) : 선씨는 周황실 皇族 후손이며 황제의 후예

중화민족이 자기들 시조(始祖)로 여기는 황제(黃帝)는 삼황오제(三皇五帝) 중

분이며 희(姬)성이고 5,500년 전 분입니다. 이분의 4세손(四世孫)이 오제

의 한 분인 제곡(帝嚳) 임금이며  곡임금의 원비 소생 중 한분이 "후직"이고 

二妃 소생중 한분이 "설"입니다.  후직(后稷)은 성으로   주문왕(周文王)

姬昌의 조상이고  (契)(子)씨가 되어 은(殷)나라 탕왕(蕩王)의 조상이

됩니다.

黄帝是中华民族的始祖,是战国至西汉初年人们就有的共识。黄帝有4妃。他有25 子,其中12个儿子继承父姓——姓姬,另外13个儿子改为姬姓以外的姓。元妃西陵 氏,为西陵氏女,号嫘祖,生子三人:昌意、玄嚣、龙苗。西陵氏所生长子昌意,降 居 (指由帝子下降为诸侯)若水,生子三人:长子名乾荒,乾荒生颛顼(高阳氏,后为 五帝之一);次子名安,居西土,其后裔为李氏;三子名悃,迁居北土,其后裔为拓跋 氏,即后来北朝的鲜卑族。西陵氏所生次子玄嚣,姬姓,降居溉水,生子娇极,娇极 生帝喾(高辛氏,后为五帝之一);西陵氏所生三子龙苗,生吾融,吾融生卞明,卞明 迁居南方,为南蛮之祖。

帝喾有四妃,元妃有邰氏,名姜螈,生子后稷,为周族始祖。二妃有蜮(s6ng嵩)氏, 名简狄,生子即 ,后为商朝的始祖。

 1.황제-  2.현효-  3.교급-  4.곡임금-  5.희성을 이은 후직과  자씨가된

 

주문왕의 후대 중 희정(姬靜)은 주 선왕(宣王)입니다. 문왕의 아들중 희단

(姬旦)은 주공(周公)이며 노국(魯國)을 개국한 분입니다.

주공의 후손인 노환공의 5세손 숙손 교여(叔孫僑如)는 집정대신(大夫)이며

사후 시호가 선백(宣伯)입니다. 또 은 탕왕의 후손인 자력(子 力)이란 분은

춘추말 송국(宋國)의 선공(宣公)입니다.

선왕.선백.선공의 후손들이 시(諡)의 “宣”자로 성을 삼으니 

각 BC800년, BC600년BC700년의 일로써 “姬”성, “子”성에서 선씨가 발원했

으며  “子”씨는 “희”씨에서 발원했으니  선씨의 전성(前 姓)은 “희”이며(성과

씨가 엄격히 구분되던 시절에는 희성이며 선씨이기에 전성이라는 표현은

사실은 맞지않음)  또한 노국, 송국은 周의 제후국이므로 씨는 주황실

(周皇室)의 후손들이며 제곡 임금의 직계이고 황제의 후예입니다.

그중 주선왕은 선씨의 시종(始宗)이십니다.

 

「姓氏」:在现代汉语中是一个词,但在秦汉以前,姓和氏有明显的区别。源于母系 社会,同一个姓表示同一个母系的血缘关系 而 氏的产生则在姓之后,是按父系 来标识血缘关系的结果,这只能在父权家长制确立时才有可能。

성씨는 요즘 하나의 단어일 뿐이지만 중국의 진.한 이전에는 성과 씨를 엄격히 구분하였음. 당초 모계의 혈연 관계, 부계의 혈연 관계를 나타냈음. 현재는 구별하여 실익이 없고 성, 씨,성씨는 동의어로 혼용하고 있음.다만 언어의 습관에 따라 적절히

구사되고있음(*제 성은 선입니다. 저는 선씨입니다. 저의 성씨는 선입니다 .)

* “선가(家)입니다”는 낮춤말이 아니며 선씨의 가문(문별.문중)의 사람입니다의 의미.

   단 "哥"자 등을 사용했을때는 낮춤의 예라 할 수있지요.

 

 

宣氏發源: 宣出周代,溢号为姓

 1.出自姬姓,以谥号为氏。上古周朝时,周宣王的子孙以王父字为姓,相传姓宣。 据《风俗通义》载,上古周朝时,周厉王之子静,继位后为王四十六年,死后谥号 为“宣”,称为周宣王。周宣王的支庶子孙有的以王父“宣”字为氏

2.春秋时鲁桓公的五世孙叔孙侨如是鲁城公时的大臣之一,他企图除掉季孙氏和孟氏 两家,因失败被逐,逃往卫国为卿。生前对国家有功,死后朝廷追谥“宣伯”封 号,宣伯的子孙后代就取王父谥号“宣”字为姓,世代相传

 3.出自子姓,以封号为氏。据《风俗通》载,春秋时期,宋国有个君子叫力者,坐君 位十九年,去世以后朝廷追加他一个封号,叫“宣”,于是力者就被史学家称为宋 宣公。宋宣公的子孙后代

取一个宣字为姓,世代相传

 

○ 선씨의 해동(海東) 천거(遷居) : 한반도로 이주

 한서에 근거하여 중국의 선씨들이 한말에 다수 한반도로 피난왔음을 서두에

밝혔습니다. 앞선 기록으로 1613년 2월에 판서공(예의판서 원지) 9대손이며

호란 원종1등공신인 문환(文煥)님이 “(선씨들이) 중국에서 동토로 왔는데

백제 전에는 복호촌에서 살았다”고    삼국시대 이전 또는 초기 부터

한반도에 이주해왔음을  최초로 글로 남기셨습니다.

自中國來 東土矣 奧在 百濟前 宣氏 世居 伏虎村

 

이주 경로는 기록으로 나타나있지 않지만 육로보다는 긴급히 피난이 용이한

해상을 이용하여 우리나라 서남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