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 선씨 21대 종부 김정옥 주부, 종갓집 살림을 엿보다. 선병국 가옥

 

종갓집 종부로 살림을 산 지 어언 30년이 훌쩍 넘었다는 김정옥 씨. 그녀의 시어머니는 물론 대대로 내려오던 가문의 살림비법에 그만의 살림 노하우가 더해져 더욱 특별한 충북 보은군 장안면 아흔아홉 칸 고택의 살림을 들여다보았다.


350년 된 종부표 ‘씨간장’의 깊은 맛


종부에게 장을 담그는 것은 수도승이 도를 닦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시집온 지 벌써 30년이 훌쩍 넘었건만 처음 시집와서 시할머니가 자신을 불러 앉히고 했던 말을 잊을 수가 없다.

 

‘집안이 망하지 않고서는 장 담그기는 멈출 수 없는 법이다. 장이란 곧 그 집이다’라는 말이다. 어린 나이였고 낯선 시집이 한없이 어렵고 넓게만 느껴졌던 그녀가 시할머니의 말씀에 담긴 뜻을 이해하기에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가풍이 엄격하고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하루하루가 고되고 힘들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일어나던 때에도 장 만들기를 멈추지 않을 만큼 장을 중히 여긴 집안이에요. 아직도 5대조까지 제사를 지내는데, 그 제사에는 새로 담근 장을 꼬박꼬박 올린답니다.”


1리터에 500만 원에 팔려 주변 사람을 깜짝 놀라게 했던 350년 된 이 집의 씨간장은 보은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유명하다.

 

시어머니, 시할머니, 더 멀리는 조선 중기의 며느리 손맛까지 깃든 씨간장은 햇빛, 바람, 질 좋은 발효균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집안의 가보라고.

 

좋은 재료와 정성으로 빚은 간장


장맛은 손맛과 정성이지만 장맛을 좌우하는 가장 큰 요소 중 하나는 역시 좋은 재료다. 주변에서 최고로 좋은 콩을 공수하고 콩의 티를 하나하나 손으로 골라내는 정성이 곁들여져야 비로소 맛있는 장을 담글 준비가 끝난다.

 

장을 담글 때 모든 방식은 아날로그로 진행된다. 새 간장을 담글 때 반드시 묵은 간장을 섞는다고. 그래야 옛 간장 속에 살아 있는 영양소와 발효균이 햇간장으로 옮겨 가 350년 된 깊은 간장의 맛을 내는 것이다.


그녀만의 비법을 더한 간장과 고추장


종갓집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적인 방법에 보은의 특산물인 대추를 넣어 고추장을 만들면 고추장이 보다 차지고 빛깔 역시 곱다. 간장 역시 전통 간장을 계승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연구하고 고민해 다양한 종류의 간장을 만들어내고 있다.

부종에 효과 있는 옥수수 수염차


옥수수를 먹고 나면 수염을 버리지 않고 햇볕에 바싹 말려 차로 끓여 낸다. 옥수수 수염차는 달큰하고 구수할 뿐만 아니라 이뇨효과와 부종을 막아주는 특효약이기도 하다.


제철 채소로 담근 별미 장아찌


종갓집의 깊은 장으로 담근 장아찌는 어떤 채소로 담아도 그 맛이 깊다. 잘 익은 깻잎장아찌는 따로 양념을 하지 않고 갓 지은 밥에 올려 먹으면 입안 가득 짭조름하면서도 향긋한 향이 퍼진다.


자연에서 채취하고 자연에서 말린 식재료


태양초를 만드는 일은 참 번거로운 일이다. 해가 마당 깊숙이 들면 양지 바른 곳에 일일이 손으로 닦은 고추를 널어둔다. 행여 비라도 올라치면 재빨리 걷고 해가 나면 다시 펴야 하기 때문에 그 번거로움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이렇게 정성을 다해 고추를 말려 고추장을 담그면 그 때깔이 다르다고. 그녀가 만드는 모든 음식은 자연에서 채취하고 자연에 널어 말린 재료로 만들어진다.

세월의 흔적이 엿보이는 그녀의 살림살이


100여 년 전 사용했던 동으로 만든 향로부터 세월의 더께가 느껴지는 소반, 야채를 담는 대바구니 등 그녀의 살림살이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다.

 

스물다섯에 시집온 도시 처녀가 시어머니의 살림을 물려받아 살림을 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았을 터. 이제는 세월이 많이 바뀌어 좋은 가전제품도 많고 편리한 도구도 많아졌지만 그녀의 살림살이들은 여전히 아날로그다. 거실 한 귀퉁이에 놓인 구식 선풍기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녀의 취미는 골동품 수집. 대대로 내려오는 골동품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은 물론, 주변에 서 신기한 골동품을 발견할 때는 주저 않고 사 모은다. 그래서 그녀의 집에는 절구, 맷돌 등 원래 있던 물건들 외에도 손때 묻은 골동품들이 많다.

 

집안에 워낙 크고 작은 행사가 많아 시간을 내어 예쁜 그릇과 가구를 구입하러 품을 팔 시간도 없고 집에 어울리지 않는 살림살이를 들이기도 꺼려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둘 모은 골동품들은 장식장에 모셔두기 보다는 일상에서 직접 사용하곤 한다. 오래된 단지는 간장이나 깨소금 통으로 사용하거나 컬러감이 예쁜 모시 보자기 위에 올려 장식하면 한 폭의 그림이 된다.

 

김정옥 씨의 보물창고인 장독대


 

사람들에게 잘 공개하지 않는 그곳에는 장맛의 비법인 씨간장이 숨겨져 있다. 평소에는 빗장을 걸어 외부인의 출입을 막고 있다. 350년 된 씨간장을 보관하는 항아리 역시 350세의 나이를 자랑한다.


 

가보를 실제 살림살이로 사용


 

집안 곳곳에 놓은 살림이 모두 역사를 지닌 골동품 수준이다. 그릇을 정리해둔 장식장 역시 집안의 역사를 함께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버리고 새로 사기보다는 대대로 물려온 가구를 깨끗하게 사용하고 관리하는 것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는 그녀의 생각이 엿보인다. 콩을 고르는 작은 소반부터 깨소금 항아리까지 집 전체가 전통문화박물관이다.


 

골동품에 현대 감각을 믹스 매치


 

모든 살림이 다 오래된 골동품은 아니다. 그녀가 아끼는 장식장에는 종갓집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화려한 찻잔 세트가 눈길을 끈다. 오래된 그녀의 장식장 속 앤티크 찻잔 세트는 눈에 거슬리기는커녕 오래된 나무의 질감과 화려한 컬러가 어우러져 장식 효과를 톡톡히 하고 있다.


 

종갓집의 오래되고 소박한 살림들


 

집안 곳곳에는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오래된 살림들이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다. 낡고 훼손된 부분도 있지만 아직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는 살림들이 많다.

 

나물을 말리거나 콩을 담는 쓸모 많은 대나무 바구니들이 벽에 정갈하게 걸려 있다. 사용하지 않고 걸어 놓기만 했으면 금방 낡고 못쓰게 됐을 살림들을 매일 사용하고 닦고 관리해 오히려 더 오래 수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

 

전통을 그대로 보존한 인테리어


그녀가 살고 있는 집은 아흔아홉 칸의 ‘선병국 가옥’으로 중요민속자료 제134호다. 한옥 개인주택 중 가장 큰 규모의 고택이다. 흔히 보는 고가와는 달리 지어진 지 100여년 밖에 안 되었기 때문에 이씨조선에서 근세로 이어지는 개화기의 전통고가의 변화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사랑채, 안채, 사당을 기본으로 대문채, 행랑채, 화장실 등 부속건물과 텃밭, 장독대, 정원을 두루 갖춘 대규모 가옥으로 과거에는 과객실, 방앗간채까지 있다.

 

사랑채는 앞뒤 모두 툇마루를 설치하여 더욱 넓은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한 것이 포인트. 이 집은 I자형의 특이한 구조로서 시멘트, 벽돌 등 새로운 건축자재가 사용되고 한옥의 규모를 크게 하는 등 구한말 변화하는 한옥의 양식을 보여준다.


대대로 내려오던 고택이기 때문에 리모델링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게 김정옥 씨의 설명이다. 대신 사람을 써 창호지를 바르고 나무문을 닦아내는 등 세심하게 관리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인테리어 역시 최대한 옛 모습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현대적인 소품과 어우러질 수 있도록 꾸몄다. 때문에 가구들을 새로 들이기보다는 테이블이나 장식장 위 등을 데코할 수 있는 작은 소품들 위주로 포인트를 주었다.

 

리모델링 대신 캐주얼한 꽃과 나무로 변화주기


한옥의 장점이 많은 집이지만 지나치게 격식을 갖춘 것 같아 딱딱해 보일 때도 많다. 그런 딱딱함과 격식을 상쇄시키기 위해 생각해낸 것이 나무와 꽃을 심는 것이었다.

 

사랑채 앞 너른 마당은 물론 안채의 정원까지 다양한 컬러와 종류의 꽃을 심어 집안 분위기가 화사해지도록 했다. 국화, 해당화, 봉숭아 같은 전통 꽃은 물론 백합이나 담쟁이넝쿨 같은 이국적인 꽃과 식물을 함께 심어 고전적인 분위기와 캐주얼한 분위기가 동시에 난다.

 

또한 화려한 색감의 꽃들과 흙벽과 기와 등이 잘 어울려 현대와 과거가 절묘하게 어우러짐을 느낄 수 있다.

 

잔디를 깔아 깔끔하게 정리한 마당


안채 마당 주변으로는 행랑채가 쭉 둘러 있다. 마당을 중심으로 무려 30여 개나 되는 방이 있는데 요즈음은 공부하는 학생들이 기거할 수 있도록 고시원으로 운영되고 있다. 안채 마당은 잔디를 심어 정원으로 꾸몄다. 한옥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지만 가족 모임을 갖기에 좋다.

 

 

부채를 걸어 꾸민 정갈한 벽면


방 안 역시 특별한 꾸밈은 느껴지지 않지만 여백의 미를 살려 걸어놓은 다양한 종류의 부채들은 예술 작품을 걸어 놓은 듯 정갈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자세히 보면 보자기, 노리개 등 크고 작은 소품들을 요소요소에 장식해 집안 전체 분위기가 편안하면서도 평범하지 않은 기품이 흐른다.


 

 

동양 향기가 물씬 나는 인테리어 소품들


항아리에 동백꽃을 꽂아 두거나 앤티크한 그릇을 올려둔 색감이 화려한 모시 보자기, 전통 문양의 부채를 벽면에 붙여 데코하는 등 집안 곳곳이 한국적 색채로 가득하다. 이 집 인테리어의 포인트는 물 흐르듯 편안하고 튀지 않는다는 것. 또한 여백의 미를 중요시해 정갈하고 깔끔하다.

/ 여성조선
  진행 강부연 기자 | 사진 방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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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보은 선병국 가옥

 

 

중요 민속자료 제134호인 외속리면 하개리 선병국가옥이 전통문화를 재현하는 촬영장으로 각광을 받고 있어 보은의 명소로 자리매김할 전망이다.

 

특히 전국 99칸 대저택의 한옥중 한곳인 선병국 가옥은 안채와 사랑채가 원형 그대로 복원되어 있는 가운데 사랑채의 경우는 전국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고풍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충북 보은 선병국 가옥

속리산 남쪽 줄기 충북 보은군 외속리면에 자리한 선병국 가옥은 1백여 년 전 전남 보성 선 씨 일가가 명당자리를 찾아 23년간 정성들여 지은 대가이다.

속리산에서 흘러내리는 삼가천 중간에, 마치 연꽃이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연화부수형 명당에 지어진 1백 칸이 넘는 한옥은 멀리 산자락을 병풍 삼고, 아름드리 소나무를 호위병처럼 거느리고 있다.

이 저택에는 고 선병국 어른의 아들인 선민혁 씨(58세)와 김정옥 씨(53세) 부부가 살고 있었다.

 

충북 보은에 '선병국 가옥'으로 알려진 큰 한옥은 현재 중요민속자료 134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집은 1904년

부터 1921년까지 지어졌다.
1984년에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될 때 선병국 씨가 살고 있었기 때문에 '선병국 가옥'으로 이름 붙었다.

조선 말기, 백성들의 가옥 규모에 대한 규제가 많이 풀렸어도, 100칸 이상 규모의 집을 짓지 못하게 했던 탓인지 선병국 가옥도 일반적으로는 99칸 한옥으로 불리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100칸이 훨씬 넘는 134칸 짜리 가옥이라 한다.

비록 오래된 가옥은 아니지만, 구한말 전통적 건축 기법을 벗어나, 변화하는 한옥 양식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로 손꼽히는 곳이다.

 

 

 

 

 

 

 

안채 현판  위선최락(爲善最樂) : 선을 행하는 것이 최고의 즐거움  (주희)

 

 

 

 

 

추사(秋史) 김정희  무량수각(無量壽閣) 완당(호) 

해남 대흥사의 무량수각을 복각한 현판.

 

무량수각 无量壽閣이라는 현판은 현재 도둑이 훔쳐 가고 없다고 합니다. 완당의 모조 현판이라 그나마 다행입니다. 

 

대흥사는 전남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799에 위치한 유서깊은 사찰로 신라 진흥왕 5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하였다. 문화재 자료 제 78호 지정되어 있는 대흥사는 13대종사 와 13대강사 를 배출한 우리나라 31본산의 하나로 조선후기 불교 문화권의 산실이었다.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로 귀양갈 때 쓴 무량수각.  전남 해남군 두륜산 대흥사 승방에 걸려있습니다.

 

김정희(金正喜, 1786년 ~ 1856년)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서예가·금석학자·고증학자이다. 본관은 경주, 호는 완당(阮堂)·추사(秋史)·예당(禮堂)·시암(詩庵)·과파(果坡)·노과(老果) 등이다. 한국 금석학의 개조(開祖)로 여겨지며, 한국과 중국의 옛 비문을 보고 만든 추사체가 있다. 그는 또한 난초를 잘 그렸다.

 

 


보은 선병국 가옥은 규모 면에서 우리나라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을 만한 집이다.

 

지금은 한국전쟁과 수해를 입어 규모가 많이 축소되기는 하였지만 아직도 그 당당함을 느낄 수 있다. 선씨가문은 원래 전라도 고흥군 금산면이 고향이었다.


선씨가문은 전라도 토박이로서 지금도 보성에는 선씨가문의 출신의 충신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오충사(五忠祠)가 있다고 한다. 고흥에서 가문을 거부로 만드신 분은 현재 종손의 증조부인 선영홍(宣永鴻)공이다.


종부의 말에 의하면 당시에는 소작료로만 벼 만석을 거두어들일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거부가 집을 지었으니 당당하고 거대한 장원을 형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솟을대문밖에 있는 군부대도 이 집의 소유라고 하고 현재 담으로 둘러진 곳만도 3000여 평이 된다고 하니 예전의 집 규모를 감히 어림잡기도 힘들다.


선 씨 가문은 단지 돈을 버는 것에 집착한 것만은 아니었다. 증조부나 조부는 교육에 대한 투자는 남달랐다. 종부의 말로는 증조부가 이곳에 자리잡은 후 교육에 많은 투자를 하였다고 한다.


집 앞에 관선정(觀善亭)이라는 건물을 짓고 뛰어난 인재에게 숙식을 제공하며 가르쳤다고 한다. 그러한 교육에 대한 열의는 해방 후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한학자로 유명한 임창순(任昌淳 1914∼1999)이 이곳 출신이다. 선씨 가문에서는 인재들을 모아 가르치면서 후에 어떠한 대가를 바란 것이 아니었다.


인재로서 크기만을 바라면서 공부를 시킨 것이다. 과연 현재의 부자들 중에서 이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인재를 육성하는 사람이 있을까 궁금하다.


이 집터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고 하는 명당으로서 이곳으로 이사온 증조부인 영흥공이 터를 잡았다고 한다. 집은 1919년에서 1921년에 걸쳐 지어졌는데 당대 최고의 목수를 초빙하여 지었다고 한다.


종부의 말에 의하면 증조부가 이곳에 이사와서 잠시 기거할 집을 주변에 마련해 놓고 한꺼번에 집을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무 중에는 멀리 춘양에서 가져온 것도 있다고 한다.

 

이렇게 집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선씨가문이 지금의 삼성가에 비견될 만큼 대단한 거부였기 때문일 것이다.


선병국가옥의 구조는 매우 특이하다. 사랑채, 안채, 사당채가 각각 독립된 영역으로 되어 있어 담으로 둘러쳐 있고 집 전체를 다시 담으로 둘러놓았다. 아마도 외부로부터 집을 보전하기 위하여 이중으로 담을 두른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안채와 사랑채가 완벽하게 독립된 구성을 하고 있는 것도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특징이다. 외부를 둘러친 담만 없다면 두 채의 서로 다른 집이라고 착각할 정도이다.

 

이러한 구성은 안채와 사랑채간의 연결은 철저하게 하인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을 전제로 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남향하고 있는 사랑채와 서향하고 있는 안채의 평면은 모두 工자 형태를 하고 있다. 이러한 평면형태는 집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형태는 아니다. 일부에서는 工자 형태는 불길하다고 하여 금기시되는 형식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맹씨행단이 이러한 형태의 평면을 하고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형식의 평면이다. 이러한 평면형식은 강한 대칭성을 보여주고 있어 일반 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강한 권위를 보여 준다.


사랑채는 남향을 안채는 서향을 하고 있는 이유가 명확하지 않다. 사랑채의 남향은 당연한 것이지만 안채의 서향은 여러모로 불편한 향이기 때문에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전체적인 배치를 보았을 때 사랑채와의 연계를 생각하여 배치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은 가지지만 이것이 정확한 답은 아닐 것이다.


이 집은 일제시대에 지어진 집이다. 조선시대의 규범이 조선조 말에 와해되기 시작하여 이 집을 지을 즈음에는 새로운 규범들과 혼재되어 새로운 사회구조를 형성해나가던 시대이다. 건축에서도 이러한 변화가 특징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던 시기이다.


평면의 구성, 공법, 재료, 규모 등에서 많은 변화가 나타난다. 이러한 변화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조선시대에 보여주었던 건축규제가 흐트러지고 새롭게 등장하는 공업화된 재료를 사용하는 것이다. 이곳 선병국가옥에서도 여러 곳에서 그러한 모습이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신분에 따라 건물규모를 규제하였다. 규제 방법은 칸수의 제한하고 기둥높이를 제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분사회가 와해되면서 이러한 규제가 무의미해졌다. 이제는 경제력만 있으면 크고 좋은 집을 지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선병국가옥도 그러한 모습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안채와 사랑채의 기단과 초석으로 다듬은 돌을 사용하였고 기둥도 당당하게 원기둥을 사용하였다. 기둥도 높게 세워 집의 권위를 한껏 높였다. 이렇게 많은 부분에서 과거의 격식을 과감하게 벗어나고 있지만 그 나름대로 자제를 하려는 노력이었는지 처마만은 홑처마로 처리하였다.


선병국가옥은 이전의 집과 다른 점은 격식보다는 실용적인 부분에 보다 많은 배려를 하였다는 것이다. 안채와 사랑채에서 사용상의 편의를 위해 툇마루를 전후에 다 깔았다. 전면과 측면은 퇴칸으로 툇마루를 처리하였고 격식을 차릴 필요가 없는 뒷부분은 쪽마루 형식으로 마루를 깔았다.


이렇게 마루를 깔아 놓았기 때문에 안채나 사랑채 어느 곳이든 편하게 통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외에도 집이 실용적으로 꾸며진 모습이 여러 곳에서 보인다. 안채의 대청이 안채전체의 규모에 비하여 작고, 집의 규모에 비하여 안방의 크기도 그리 크지 않은 반면에 방을 많이 들였다는 점이다.

 

이렇게 방을 많이 만든 것은 집을 다양하게 쓰기 위함일 것이다. 또한 이층 다락을 많이 들여 수납공간을 충분하게 만들어 놓았다.


이러한 실용성을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이 집은 남녀유별이라는 유교적 가치가 아직은 공고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안채와 사랑채가 별채로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안채로 가려면 대문에서 돌아들어 가도록 되어 있고 안채 입구에 별도의 중문을 따로 설치하였다.


중문에서 안채로 들어가려면 다시 내외담을 돌아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대문에서 안채까지의 여정은 지그재그의 궤적을 그린다. 그만큼 내외의 성격이 더 깊어졌다. 이 집의 구조를 보면 20세기초 지방의 상류층에서는 남녀유별에 대한 의식이 사회의 일반적인 추세와는 달리 오히려 더 깊어졌던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선병국 가옥의 여러 곳에서 솜씨가 좋은 목수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 안채의 대들보는 자연적으로 휘어진 나무를 자연의 그대로의 모습을 살려 이용하였다. 이렇게 휘어진 나무를 다룰 수 있는 목수는 그렇게 흔치 않다. 그리고 문짝을 보면 어느 한곳 소홀한 곳이 없다.


안채의 곳간이나 부엌으로 들어가는 문, 곳간의 광창까지 비례가 잘 맞게 짜여졌다. 곳간의 광창도 팔각형으로 만들어졌는데 이러한 형식의 창문은 다른 집에서는 안채의 중요한 방에만 설치되는 것이지만 이곳에서는 다락의 창문으로 사용되었다.


무엇보다도 선병국가옥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집의 규모에 있다. 사랑채나 안채의 규모가 너무 커 집의 구조가 한눈에 읽혀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안채의 마당이 웬만한 집의 대지 전체의 크기이다. 너무 넓어 축구장을 해도 될 것 같다. 안채의 대청에서 마당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시원해진다. 이러한 시원함은 사랑채도 마찬가지이다.


워낙 대지가 넓다보니 집 주변을 돌아보는 것만도 한참 걸린다. 지금은 소나무가 많이 사라졌지만 예전에는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 운치가 있었다고 한다. 이 집을 지은 증조부도 소나무에 애착이 많아서 큰 소나무에는 소나무마다 관리인을 두어 관리할 정도였다고 한다.


현재 이 집의 사랑채에서는 전통찻집을 안채에서는 고시원을 운영하고 있다. 고시원은 16년 전 이 근처에서 고시원을 운영하던 분의 권유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제는 전국에 알려진 고시원이 되어 대기하는 사람이 줄을 섰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문화재로 지정된 고택은 어떻게든 활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집을 전면적으로 개조하지 않으면서도 활용할 수 있는 찻집이나 고시원으로 고택을 활용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안주인의 말로는 고시원을 하기 전에는 저녁때 집에 들어오는 것이 매우 싫었다고 한다. 깊은 밤 불꺼진 집에 들어올 때는 섬뜩하기까지 했단다. 이제는 늘 사람들이 있어 그러한 느낌은 없다고 하였다.


집은 사람이 살아야 빛이 난다. 예전에는 하인들이 있어 주인이 집을 비워도 사람사는 느낌이 있었지만 이제 하인들도 없는 집에 단 두 내외가 산다고 한다면 집은 적막하고 쓸쓸하기가 이를 데 없을 것이다. 선병국가옥도 너무 넓어서 관리가 하기 힘든 집이다.


만일 이렇게 라도 활용하지 않았다면 마당에는 잡초가 우거졌을 것이고, 불을 때지 않는 구들은 거북 등처럼 갈라졌을 것이며, 마루와 나무는 갈라지고 터져서 그야말로 흉가 그 자체였을 것이다.


종부의 말에 의하면 대청에 아무리 기름칠을 해도 사람이 밟고 지나지 않으면 윤이 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만큼 사람의 손길이 집을 만드는 것이다.